제주 서남쪽 들판 위 시간의 흔적, 알뜨르비행장 산책기

서귀포시 대정읍 일대의 평야를 따라가다 보면 바람이 유난히 세차게 부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알뜨르비행장입니다. 늦가을 오후, 햇살이 길게 누워 있는 시간에 찾았는데 들판 위로 철제 격납고가 어둡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주변은 한없이 넓고 고요했지만, 그 안에 깃든 역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비행장과 격납고가 지금은 국가유산으로 남아, 과거의 상처를 담담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 들리는 들판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 땅이 품은 시간의 깊이를 다시 느꼈습니다. 여행지라기보다는 기록된 기억 속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1. 들판 끝에 자리한 비행장으로 가는 길

 

알뜨르비행장은 대정읍 하모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에 ‘알뜨르비행장 격납고’를 입력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도착합니다. 주차는 비행장 입구 근처의 작은 공터에 가능합니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자갈길이 이어지는데, 차량을 두고 걷는 편이 좋습니다. 주변에 표지판이 간결하게 설치되어 있어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습니다. 도로 옆으로는 넓은 목초지가 펼쳐지고,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들이 잔잔히 흔들렸습니다. 날이 맑은 날에는 한라산 능선이 희미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풍경이 비행장으로 향하는 길을 한층 묘하게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가는 길’이 아니라, 이미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습니다.

 

 

2. 바람과 철의 구조물이 만든 풍경

 

격납고는 총 여러 동이 남아 있는데, 각각의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다릅니다. 콘크리트 벽면은 세월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었고, 일부는 균열 사이로 풀이 자라 있었습니다. 내부로 들어서면 공기가 차가웠고, 울림이 크게 퍼졌습니다. 누군가의 발소리 하나에도 금속성 잔향이 남을 만큼 정적이 짙었습니다. 햇살이 벽 틈 사이로 스며들며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느리게 움직였습니다. 한쪽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당시 비행기 배치와 격납고 구조가 설명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체계적이었습니다. 전쟁의 잔재가 이토록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섬뜩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럼에도 공간 자체는 묘하게 아름다웠습니다. 침묵 속에서도 형태의 힘이 전해졌습니다.

 

 

3. 일본군 격납고의 구조와 남겨진 흔적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는 대부분 지하 일부를 활용한 반지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폭격을 피하기 위해 땅을 파고 들어가 철근과 콘크리트를 덮은 구조였습니다. 벽면에는 당시 사용된 철근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천장은 둥근 아치형으로 설계되어 공기의 흐름이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내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비어 있었지만, 한쪽 구석엔 누군가 두고 간 낡은 군화 한 짝이 있었습니다. 그 작은 물건 하나가 수십 년 전의 긴박한 시간을 상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부 격납고는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외부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 구조미가 인상 깊었습니다. 단순한 군사 시설이 아니라, 공학적 설계의 결과물이자 역사의 증언처럼 느껴졌습니다.

 

 

4. 현장에서 느껴지는 의외의 차분함

 

비행장 주변은 생각보다 조용했습니다. 들판을 감싸는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입구 근처에는 안내소와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늘 아래 벤치가 있어 잠시 머물기 좋았습니다. 음료를 파는 자판기도 설치되어 있었고, 쓰레기통이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관리가 잘 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주변에는 전쟁 관련 전시물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었는데, 군사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설명문이 따뜻한 어조로 쓰여 있었습니다. 방문객들이 남긴 메시지판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이라는 글귀가 유난히 많았습니다. 전쟁의 냄새보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5. 알뜨르와 이어지는 주변 길

 

알뜨르비행장을 둘러본 후에는 인근 대정읍의 모슬포항으로 향했습니다. 차로 10분 남짓 거리에 있어 이동이 편했습니다. 항구 근처에는 고등어회 전문점과 오래된 커피숍들이 모여 있었고, 어선들이 드나드는 풍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모슬포포구 끝의 송악산 쪽으로 이어지는 해안길도 추천할 만합니다. 걷다 보면 알뜨르의 들판이 멀리 보이면서 제주 서남쪽의 지형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날이 맑은 날엔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시야에 들어와 특별한 풍경이 완성됩니다. 비행장과 바다를 함께 둘러보면 제주가 지닌 역사와 자연의 결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짧은 이동으로 서로 다른 시대를 오가는 듯한 감각이 생겼습니다.

 

 

6. 방문 전 유의할 점과 관람 팁

 

비행장 내부는 바닥이 고르지 않아 운동화 착용이 필수입니다. 비가 온 다음 날에는 흙길이 젖어 미끄럽기 쉬우므로 건조한 날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격납고 내부는 어두워서 손전등이나 휴대폰 라이트를 준비하면 도움이 됩니다. 주차장은 크지 않아 주말보다는 평일 오전이 한적합니다. 또한 강한 바람이 자주 불기 때문에 모자나 가벼운 물건은 바람에 날리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관람 동선은 일방통행 형태로 이어져 있어 순서대로 이동하면 자연스럽게 주요 지점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너무 빠르게 걷기보다 천천히 머물며 공간의 소리를 듣는 것이 좋습니다. 그 정적이야말로 알뜨르비행장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마무리

 

알뜨르비행장과 일본군 격납고는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공간이지만, 지금은 평화를 이야기하는 장소로 변했습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로 부는 바람이 과거의 기억을 부드럽게 덮고 있었습니다. 한때 비행기의 굉음이 울리던 곳이 이제는 새들의 울음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로로 다가왔습니다.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다른 계절의 빛과 바람 속에서 또 다른 표정을 만나고 싶습니다. 제주라는 섬이 품은 아픔과 회복의 역사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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